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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 재 숙 (작가, 연구공동체-우리실험자들 회원)

 이미지 - Aporia

아포리아는 해결할 수 없는 난관, 해결 불가능한 역설을 말한다.

아포리아는 어디서 오는가? 창조하는 이에게 아포리아는 숙명이다.

그는 당연한 것들을 낯설게 보고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아포리아를 만들어내고 또 그것을 돌파할 출구를 찾는다.

아포리아의 생성과 출구-찾기의 ‘반복’ 속에서 만들어지는 ‘차이’가

작품으로 응결된다. 김덕기는 이미지로부터 회화의 아포리아를 실험한다.

 

Aporia1. 사진에서 무엇이 생성될 수 있나?

 

김덕기의 작업은 사진이미지를 캔버스화면에 옮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현대회화는 사물의 재현에서 벗어나 형상을 추상해왔다. 회화가 사물의 재현으로부터 멀어진 것은 사진기술의 일반화가 결정적이었다. 재현이 사진의 것으로 확정되면서 회화는 구상에서 빠르게 철수하였다. 하지만 추상의 영역에서 자신을 구축하기까지 회화는 ‘재현의 강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가 사진이미지를 오브제로 선택한 것은 현대회화가 경유한 일들에 무심한 천진함이 있다. 단지 흥미로운 것을 오브제로 포착했을 뿐, 그것이 무엇인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Wedding2>

 

한편 인터넷이 공기처럼 일상이 된 환경에서, 그에게 디지털 이미지들은 아날로그 실재보다 자연스럽다. 사물이든 인물이든 실재를 경험하는 일이 덜 익숙하고, 인터넷 사진이미지들이 오히려 사실적일 수 있다. 그에게 사물의 이미지는 실재보다 먼저 사진이미지로 떠오른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터넷 이미지가 더 리얼하다. 사과도 여자도 그렇다.” 이제 사진은 그에게로 와서 ‘재현의 강박’이 아니라, ‘작업의 도구’가 된다. 그의 작품에 느껴지는 아이 같은 무구함을 보면, 어쩌면 그는 사진을 ‘놀이의 도구’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Guitar>

 

사진이 이미지를 잡아두는 방식으로 형상을 구체화시킨다면, 회화는 형상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추상한다. 어떤 오브제든 형상이 형상인 채로 회화의 평면에 들어올 수 없다. 따라서 사진이미지를 오브제로 하는 그의 작업은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 “사진이미지에서 새로운 무엇이 생성될 수 있을까?” 샘플링 음원을 작곡의 요소로 사용하는 것처럼, 그는 사진을 작업재료로 취급하면서 사진이 포착한 이미지를 재해석한다. 그래서 원본의 의미가 지워지고 사진의 흔적이 남지 않는 추상적인 캔버스를 만든다. 사진도 회화도 아닌 식별 불가능한 것으로 추상되는 이미지. <Protectorscope>

 

Aporia2. 이미지의 형상은 어디로 날아갔나?

 

김덕기의 캔버스는 파스텔 그림 위로 거대한 붓이 지나간 듯 색채가 날아가고 없다. 그렇게 그리다 만 것 같은 미완의, 흑백에 가까운 화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림에서 바람 냄새가 날 것 같은. 색채는 어디로 날아갔을까? <Display2> 좀 더 들여다보면 색채만 날아간 게 아니라, 형체도 사라지고 없다. 불분명한 윤곽선으로 그려진 오브제는 인물의 얼굴이 지워지거나 사물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오래 햇빛 아래 노출된 빛바랜 흐릿함 같은. 형체는 어떻게 지워졌을까? <Ceremony>

 

그는 사진의 색채와 형체를 지우는 방식으로 ‘이미지가 덮고 있는 의미’를 지우려고 한다. 사진의 원본성이 가진 갖가지 감성들, 즐거움과 우울, 소란스러움과 침묵까지. 그리고 사진의 앵글이 포착한 의미 뿐 아니라 내가 사진이미지를 선택한 가치들, 호기심이나 아름다움 같은 것까지. 이미지의 탈색과 지우기 작업을 통해, 그의 캔버스는 그림일 수 있는 최소한의 표현형식만 남은 듯 보인다. <Two girls> 이미지가 선명할수록 그것의 의미 또한 하나로 고정되며, 그것은 사진의 것이지 회화의 방식이 아니다.

 

색채와 형체를 흐리게 하여 고정된 의미를 지우면서 그의 캔버스는 다채로운 감각이 생성되기를 꿈꾼다. 그것은 형상을 고정화시키는 사진이미지에서 오히려 감각의 자유로움을 실험하는 것이며, 사진이미지를 재해석하는 회화적 감각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고 대신 바람과 빛의 흔적만 흐릿하다. 서로 쌍둥이처럼 겹쳐 누운 두 소년의 그림 앞에서 누군가는 혼곤한 피로를, 또 누군가는 가출과 방황을,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동성애적 코드를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Two friends sleeping2>

Aporia3. 이미지는 어떻게 감각되는가?

 

김덕기는 사진의 앵글에 잡힌 대상이나 자신이 포착한 사진이미지의 의미들이 모두 불확실하다고 한다. 수많은 사진이미지 가운데 오브제로 선별된 것들은, 그가 가진 개별적이고 특이적 감각을 반영하고 있다. 나는 무엇에 흥미를 느끼고 호기심을 갖는가? 하지만 그것들이 오브제로 선택된 순간, 그것을 포착한 것이 나의 감각인지 의심스러워진다. 사회의 일반적 가치와 사회의 보편적 의미에서 나의 감각은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은 지금-여기의 시간과 공간에서 누구나 갖게 되는 ‘평범과 보통’을 표현하는 게 아닐까?

 

그는 개별적 의미와 사회적 가치 사이에서 생기는 감각의 불확실성을 ‘나른함’이라고 말한다. 내가 그것을 특이하다고 느끼는 순간 사회적으로 평범해지는, 마치 손으로 움켜쥘수록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이것이 나의 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캔버스는 감각의 불확실성에 대한 물음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와 같은 용법으로. “이 물음에 답할 수 없는 회의가 나른함이란 상태로 이어졌다.” 감각에 대한 이 나른한 불확실성에서 이미지의 색채는 지워지고 형체는 흐릿하게 가라앉는다.

 

그가 포착한 감각에 대한 불확실성이 해결 불가능한 이미지-아포리아로 생성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특이적 감각은 개별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다.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며, 그 사회의 보편적 욕망 속에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보편성을 뚫고 솟아나는 개별성만이 특이적 감각을 획득한다. 그는 자신의 아포리아를 천진하게 바라보고 정직하게 그린다. 이 정직함이 자신의 이미지-아포리아에서 탈주할 수 있는 출구를 찾게 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래서 다른 차원에서 또 다른 아포리아를 만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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